2026년 9월 10일
바로를 무대 위에 세우신 하나님
로마서 9:17~18
관리자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하다가 뜻밖의 인물에게로 시선을 바꿉니다. ‘에서를 미워하셨다’라는 편을 다루면서 정작 에서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애굽의 바로에게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에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신 목적을 친히 선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롬 9:17)”. 바울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목적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우다’로 옮긴 ‘엑세게이로’는 ‘너를 창조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워 있는 자를 일으켜 세우고, 이미 있는 것을 불러내어 앞에 세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완악한 한 사람을 역사의 특별한 시점, 그 자리에 세우셔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이름을 온 땅에 알리신 것입니다. 출애굽의 모든 사건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롬 9:18)”. 여기서 ‘완악하게 하다’로 옮긴 말(스클레뤼노)이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이 말은 그저 심판을 내리신다는 뜻을 넘어, 마음을 굳게 만드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나는 그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내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하겠다(출 4:21)”라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에도 바로는 고집을 부리고,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출 8:32)” 바로 스스로 그렇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긴장을 피하려고, 하나님이 그저 바로를 내버려두셨다는 뜻일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동적인 주권과 사람의 책임이 한 사건 안에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동시에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무대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그 무대 위에 세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 마음이 오늘도 그분 앞에 부드러운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완악한 자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굳어 가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날마다 부드러운 마음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완악한 바로를 통해서도 이름을 나타내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인 것입니다.